보통은 핸드폰으로 구글 Keep memo에 일기 같은 기록을 하지만 내키는 날엔 Pages에도 글을 남긴다. 오늘 이전에 쓴 글을 둘러보다 왠지 조금 공유하고 싶었다. 그날의 나는 어땠는지.

 

insecurity. 줄리가 어제 통화하면서 내 상황에 대해 말한 단어이다. (호주 워홀 당시 알게 되어 아직도 가끔 연락하고 있는 대만인 친구다) 저 단어를 듣자 나는 '지금 내가 머무르고 있는 이 방이 원인인가?' 라고 생각했다.

방음이라고는 안되는 오래되고 낡은 다가구 주택의 옥탑. 어두운 밤 덜컹대며 집집마다 쌓인 쓰레기들을 수거하는 소리며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뱉으며 한참을 머물러 있는 중년의 남자가 내는 소음 등 가뜩이나 예민한 내 신경을 긁거나 불안하게 하는 일이 일상인 곳.

그러나 의아하게도 이곳으로 이사 온 첫날 나는 단박에 편안함을 느꼈다. 으레 그렇듯 이사 첫날은 어색하고 낯선 느낌에 쉬이 잠들지 못하는 게 당연했는데 이곳에서는 쉽게 잠들 수 있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퇴사를 한 지 4일째. 마음이 조금 이상하다. 편안함도 있지만 불안함이 사라지지 않고 내 마음을 계속 간지럽히는 느낌. 한 직장에 가장 오래 다닌 게 2년이고 대부분 1년 주기로 그만두며 직장 사이마다 내키는 대로, 혹은 돈이 허락하는 대로 게으르게 놀며 쉬며 지내온 내가 이제는 퇴사하자마자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나이가 들어가는 걸까.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참 부럽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나는 정말로 해보고 싶은 게 많다. 그래서 이런저런 직업을 가져보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살아왔다. 사실 이번 퇴사는 작년에 입사할 때부터 계획했고 합의했던 것으로 올 연말이 되기 전 태국으로 떠나 1년 정도 거주할 생각이었는데 몹쓸 전염병의 영향력이 이 지경까지 커질 줄은 정말 몰랐다. 쉬이 없어질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그 나라의 인구는 우리나라의 두 배 정도인데 확진자는 우리나라의 10배 이상이 매일 생기고 있다. 

백신도 맞았고 넉넉하진 않아도 이 여정을 위해 저금한 돈이 있기에 사실 강행해도 된다. 그치만 내 친구부터 너무 많은 수의 사람이 생명에 위협을 느낄만큼 버거워하고 있는 상황에 내가 나의 심적 안정을 찾으러 그 곳을 제 발로 찾아가는 것도 이제는 내키지 않는다.

항상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다. 강남의 빌딩 숲 안에 있는 건물에서 일하며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속에서는 작은 불씨 같은 게 이글거렸다. 당장 떠나고 싶다. 저 버스에 타고 싶다. 언제 떠날 수 있지? 대체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매번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는 드디어 할 수 있는 때가 왔을 때 실행에 옮겼다. 

대학을 졸업하고 500만 원도 안되는 돈을 갖고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고, 2019년 말에는 지친 나를 위한 요양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여 역시 500만원 조금 넘는 돈을 들고 기약 없이 태국으로 살러 갔다. 돈이 떨어져갈 때쯤 돌아왔고, 직장을 찾았고 1년 간 이 악물고 일을 하며 돈을 또 모았다.

이제 이렇게 사는 걸 그만하고 싶기도 하고, 당장에 떠나고 싶기도 하다. 

마지막 글이 계약직에서 정직원으로 변하기 전의 가을이었다니. 게으르기 짝이 없는 블로거…
아무튼 궁금하실 분이 계실거란 생각은 안하지만 공개적으로 글을 썼으니 결과는 알려드려야지. 결국 정규직 제안을 받아들였다.

음~ 내 스킬 부족인지 몰라도 연봉은 더 협상할 수 없었고 약간의 인센티브를 받기로 하고 사인했다. 그리고.. 후회는 하지 않지만 매우 꾸역꾸역 다니는 중.
어차피 나는 한량, 백수가 체질이고 심심함을 느끼지 않는 체질의 사람이라 그때 그만뒀다면 분명 몇 달을 놀기만 했을 것이다.

지금 회사에 진행중인 프로젝트가 있는데 사원급임에도 한국에서는 내가 상당수의 일을 맡아서 하고 있다. 외국이고 한국이고 고나리질하는 사공은 많지만 내가 그만두는 순간 프로젝트는 매우 곤란해질 것이다.

사실 이놈의 회사고 회사사람들이고 노관심인데 그냥 내 성격이, 책임감이, 당장 팽개칠 마음은 들지 않는다.
화는 난다. 나는 요새 분노의 덩어리 그 자체이다. 밖으로 분출하지 못해서 더욱 승질이 나지만, 이게 어른이 되어가는 것인가… 그러면서 내려놓으려 한다.
쉽지 않지만.


한국에서의 규모는 매우, 라고 해도 무리 없을만큼 작지만 나름 외국계 회사에 파견계약직으로 입사한 지 9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여느 회사랑 다를 바 없이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전 직장과 비교하면 실수령 액은 조금 낮아졌지만 주6일에서 주5일이 되었으니 급여는 오른 셈이나, 일의 강도가 상당히 세졌다.
물론 이전 직장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경우는 드물어도 업무 중 계약서를 다루는 일이 있어 실수를 하면 소위 x되는 자리라 긴장감이 높고, 야근이 많았었다.
지금 직장은.. 그냥 스트레스도 많고, 일도 많고, 딥빡 유발자가 국제적으로 널려 있고.. 한마디로 빡세다.
아무튼, 그렇게 갈려가며 일하다 보니 1년을 채우기도 전에 정규직 제안을 받았다. 당연히(?) 안그래도 버거운 업무량에 더해 추가 업무가 예정되어 있다. 당장은 아니라 다행이라고 우겨보지만 아무튼 미래가 고구마 100개, 1000개 만큼 답답시렵다.

정규직도 온라인으로 인터뷰를 보았다. 다른 질문은 그럭저럭 대답을 했는데 5년 후, 10년 후의 내 미래를 묘사해보라는 말에 정말 진땀이 났다. 왜냐면 나는 여기서 5년은 근무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들어왔지만 절대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생각해 본 적이 없는뎁쇼? 라고 할 수는 없어서 그냥 리더십 있고 독립적으로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아무튼, 합격(?)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계약서에 써져 있는 연봉은… 맙소사, 약 7%가 오른 금액이었다.
내 꿈이 너무 컸나…
보통의 연봉인상은 한 자리 수가 많다고 하지만, 나는 파견 계약직, 그러니까 회사 급여테이블 최하위인 걸 알고 있었기에(굳이 알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다.) 정규직이 된다면 그래도 20%는 올라야 되지 않겠나.. 싶었는데. 희망은 와르르..

내 매니저와 HR담당자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둘 다 기본급 인상에 대해서는 답이 없고 (안 된다는 답이라고 대충 알아먹음) 인센티브 이야기를 꺼내길래 오호~ 그렇단 말이지? 라며 계산기를 두드려보려는데 언제, 어떤 방식으로 산정되어 얼마나 주는 건지 설명이 없었다. 설명을 해달라는 메일을 보내도 ‘너의 평가가 100%인 경우 연봉의 몇% 가 지급된단다’ 가 설명의 끝이었다. 아니, 아무리 한국에 HR부서가 없어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사실 나는 3개월만 있으면 나오는 퇴직금에 미련이 있었는데 그 미련을 뛰어넘진 않아도 대충 괜찮은 연봉이라면 아까워 말고 사인하리라 다짐했었건만,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이 이야기를 하니 ‘그 퇴직금, 줄게’ 라고 쿨하게 나오길래 인센티브도 한달 치 월급은 되니까 ‘이정도 배려해주니 적당히 하자~’ 라며 근로계약서에 사인을 하려고 준비중이었는데, 인센티브에 대한 매니저와 HR담당자의 용어도, 시기도 다르고 둘 다 설명이 너무 모호해서 주변에서 약간의 조언을 구한 후 HR에 다시 확인을 요청하며 물고 늘어졌더니…..

나는 2024년까지 인센티브를 받을 수 없고, 급여 인상도 2024년에 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뭐, 회사 소속이 된 지 몇 달 안되어서 성과급을 주지 않는 게 회사 방침이라면 그건 받아들여야지, 에잇 왜 안줘요! 할 건 아니다. 소속이 바뀐 것이지 그 일은 내가 한 거니까(3월부터 본 업무 외에 프로젝트 진행중) 화는 좀 나겠지만.

내가 더 이상 상할 수 없을 만큼 빈정이 상한 건, 이걸 분명 알고 있으면서 말을 안하고 최대 인센티브 액수만 알려주면서 나더러 근로계약서에 사인하라고 종용한 것 때문이다. 내 매니저는 그 사실을 자기도 오늘 알았다며 2024년에는 꼭 챙겨줄 거라고 하는데, 나는 이것도 이해가 안되고 인센티브 수령 여부를 판단하는 입사 시기가 10월 1일이라는 것을 알고 회사에 신뢰를 잃었다. 내가 처음 정규직 전환이 진행중이란 걸 들은 건 8월 말, 9월 초였으니까.

그냥 진행하다 보니 늘어졌을까?
위에서 내가 조언을 구했다는 그 분은 우리 회사에 일부러 그런 짓을 할만큼 한가한 사람도, 그런 인성을 가진 사람도 없다고 했다.
이 회사에 한가한 사람이 없다는 건 대충 인정. 그렇지만 나는 내 의심이 합리적이라고 느낀다. 회사가 요새 돈 아끼려고 채용 승인도 잘 안내주고 출장도 최소한으로 제한한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들어서이거나, 아니면 내가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서일지도 모른다.

공식적인 내 답변은 ‘생각 좀 더 해볼게요 = 보류’ 이지만 나는 내 매니저에게 계약이 종료되면 떠날 예정이라고 이미 말했다.
뭔가 변화가 있다면 잠시 동안은 더 소모품으로 좀 더 굴러 볼 용의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1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퇴직금 받아 엄빠랑 베트남 여행이나 다녀와야 겠다.

아무튼, 씁쓸한 가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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